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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정공>증통훈대부군자감정공휘명묘갈명(贈通訓大夫軍資監正公諱蓂墓碣銘)
贈通訓大夫軍資監正公諱蓂墓碣銘 圭鎔自幼少時從先父兄承聆先祖 贈通訓大夫軍資監正府君之文章行誼可以立身揚名而顧遯隱以終府君以下亘四五世子孫繁昌爲當時鄉省之最實府君潛德之報云私竊識之不忘矣昔賢有言曰先祖有善不知不明也不述不仁也爲府君之子孫者烏可不思所以表章之哉顧府君歿後距今三百四五十年于玆而墓尚無顯刻之銘故今宗議欲竪一碣而文之而任不肖以其事嗚呼不肖圭鎔烏敢當哉然府君平生不喜外餙惟實地是務則今後孫之爲此擧又烏可不體府君之志而務其約哉此不肖所以不揆弇陋猥爲之泚筆而謹摭於譜牒所載及所甞聞於家中傳説以爲文者也府君姓趙諱蓂字堯瑞籍淳昌也上系累見于先代墓文今可略之曾祖彰信校尉諱昌門祖禮賓寺參奉諱愷考宣務郎訓鍊奉事諱宗元妣宜人海州鄭氏父忠傑府君生而天性孝友幼時有孝童之稱及上學不程督而白能刻意力學年未成童文義夙就能屬詞有韵後以學行著于世其事親也溫清甘旨之奉靡不用極其有不安節藥餌之煎粥飲之供必躬親執不使人或代及遭艱前後皆哀毀踰制三年不御酒肉未嘗一日脱首腰絰與弟友愛甚篤雖析箸分爨之後有無共之不見其各居之形人皆謂孝友篤行者中年築一齋于先墓之傍朝夕啓處名之曰逈感齋盖追遠感慕于祖先之烈也後以孫世望貴推恩贈通訓大夫軍資監正以甲戌十一月十八日卒距生壬戌享年七十三葬順天松光面大谷村右乙坐原配淑人金海許氏思顔女幽閑貞正配德無遠育四男三女男長允纘次允瞻次允甫次允福女適光山金勛鄭之鐸昌寧成繼祖允纘男之亨夏亨必亨濟亨致亨錫亨女適尹梓南陽洪以厚允瞻男鼎亨益亨復亨允甫男信亨順亨重亨女適鄭洵慶州李永燦玄曾以下繁不可錄嗚呼圭鎔不僩于文將不能形容吾祖實德之是懼况敢爲一字浮辭以累先德哉銘曰 有文而不能試于世有德而始能發于後嗚呼吾後裔之繁殖猗歟是祖先之積厚今不肖爲此銘愧筆力之甚苟 疆圍作噩淸明節 十一代孫 圭鎔 謹識 증통훈대부군자감정공휘명묘갈명(贈通訓大夫軍資監正公諱蓂墓碣銘) 규용(圭鎔)이 어리고 젊었을 때에 선부형께 들으니 선조 증통훈대부군자감정부군 (軍資監正府君)의 문장과 행의로 보면 가히 입신양명(立身揚名)했을텐데 숨어 살며 세상을 마치셨다고 한다. 전(傳)에 가로되 「선조의 착한 행실을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한 것이요, 기록하지 아니 하면 어질지 못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 자손된 자 어찌 표장(表章)할 것을 생각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부군이 별세하신 뒤에 이제 三백 四○∼五○년이 되도록 묘도에 아직 현양(顯揚)한 문자가 없으므로 종중에서 의논하여 비를 세우고 새기고자 불초에게 그 일을 맡기니 아! 불초 규용이 어찌 가히 그 일을 감당하리오. 그러나 부군이 평생에 가식이 없고 오직 실지를 주장하였다. 이제 후손이 이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 어찌 부군의 뜻을 따르지 않고 구차한 가식을 하겠는가? 이러므로 불초가 우졸함을 잊고 외람히 붓을 든 바이고 삼가 보첩에 실린 바와 일찍이 전하여 들은 말을 가려 글을 지은 바이다. 부군의 휘는 명(蓂)이요, 자는 요서(堯瑞)이며 순창 조씨인데 상계(上系)는 선대 묘문에 여러 번 보이므로 생략하고 증조는 창신교위 휘 창문(昌門)이요, 조는 예빈시 참봉 휘 개(愷)이며 고는 선무랑 훈련원 봉사 휘 종월(宗元)이고, 비는 의인 해주정씨(海州鄭氏) 충걸(忠傑)의 딸이었다. 부군은 천성이 효우하여 어려서부터 효동(孝童)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입학하여서는 정독없이 스스로 그 뜻을 새기고 힘써 배워서 성동(成童)전에 글 뜻을 일찍 깨달아 말을 엮어 글을 짓고 뒤에 학문과 행의로써 세상에 명성이 나타났다. 그 어버이를 섬기매 풍한서습(風寒署濕)을 고루 살피고 감지(甘旨)의 봉양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며 혹 병환이 나시면 약이미죽(藥餌糜粥)의 봉공을 반드시 몸소 간검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전후 상사에 다 예제에 지나치게 애통하고 三년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일찌기 하루도 수요질(首腰絰)을 벗은 날이 없었고 아우와 더불어 지극히 우애하여 비록 분가한 후에도 있고 없는 것을 같이 하니 그 따로 나누어 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중년에 한 재각을 선묘 곁에 짓고 조석으로 거처하며 멀리 감모한 재각 「逈感齋」이라 이름 하였으니 대개 추원 감모한 뜻이었다. 뒤에 손자 세망(世望)의 영귀로써 추은(推恩)하여 통훈대부 군자감 정의 증직을 받고 갑술년 十一월 十八일에 향년 七十三세로 별세하니 순천 송광면(松光面) 대곡촌(大 谷村) 오른쪽 을좌원(乙坐原)에 안장하였다. 배는 숙인 김해허씨 사안(思顔)의 딸로 유한정정(幽閑貞正)하여 착한 덕이 어김이 없으며, 남은 윤찬(允纘), 윤첨(允瞻), 윤보(允甫), 윤복(允福)이요, 여는 광산(光山) 김훈(金勛), 정지탁(鄭之鐸), 창녕(昌寧) 성계조(成繼祖) 처였다. 손자 지형(之亨), 하형(夏亨), 필형(必亨), 제형(濟亨), 치형(致亨), 석형(錫亨), 윤자(尹梓), 남양(南陽) 홍이후(洪以厚) 처는 장방출이요, 정형(鼎亨), 익형(益亨), 복형(復亨)은 차방출이며, 신형(信亨), 순형(順亨), 중형(重亨), 정순(鄭洵), 경주(慶州) 이영찬(李永燦) 처는 三방출이고, 증현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규용이 문한이 부족하여 부군의 실덕을 밝히지 못함을 두려워 하니 어찌 감히 뜬 말로써 선덕을 더럽히겠는가? 새겨 가로되, 공의 문학은 세상에 시험하지 못했으나, 有文而不能試于世 덕이 있어 비로소 후손에게 발양되었네 有德而始能發于後 아! 우리 후손이 번창한 것은 嗚呼吾後裔之繁殖 거룩한 이 선조의 두터운 음덕이로다. 猗歟是祖先之積厚 오늘날 불초가 이 묘갈을 새기는데 있어 今不肖爲此銘 필력이 심히 구차함을 부끄러워한다. 愧筆力之甚苟 十一代孫 규용(圭鎔)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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